군대에서 전화를 거는 일에 대하여
흔히 '일방적'이라 불리는 것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대체적으로 행위를 가하는 쪽의 폭력으로 귀결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방적 공격, 일방적 결정 등등. 그런데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 것이, 거기에다 '소통'이란 단어를 대입시키면 얘기가 또 달라진다. 소통의 기회, 즉 소통을 시작할 수 있는 권한이 한 쪽에만 주어져 있을 때, 그래서 소통이 쌍방향으로 자유롭게 이루어지지 않고 한 쪽의 일방적인 시도에 의해서만 비로소 그것이 시작될 수 있을 때는 '일방적'이라는 가치가 오히려 가하는 쪽에게 폭력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 나는 지금부터 '군대라는 곳에서 공중전화를 이용해 밖으로 소통을 하는 행위가 때로는 그들 자신에게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 More/Less 기능을 이용한 수정 06.12.30 17:30
Part I. 이제는 전화를 받을 수 없다.
이제는 전화를 받을 수 없다.
전화, 문자, 메신저 등의 다양한 수단 방법을 통해 쌍방향 소통이 자유로운 '밖'과 달리 이 '안'에서는 공중전화, 혹은 수신자 부담전화를 통해 안에서 밖으로 행해지는 일방적 소통이 전부다. 군인들이 '단절감'을 느끼는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소통의 일방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밖에서는 아무 문제없이 잘 굴러가던 이 소통이란 녀석이 안에 들어오니 갑자기 한 쪽 다리를 절름거리는 형국이라니. 내가 너에게 전화를 걸지 않는 한 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니. 언제나 내가 일방적으로 소통의 시작점을 끊어야 한다니. 그래서 2년 3개월간 군인이란 이름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남자들은 소심해지고, 서글퍼진다. 밖에서 전화를 받는 입장에서는 그저 통화를 하고 폴더를 닫아버리면 그만이지만, 안에서 거는 사람은 좀 과장해서 그 순간만큼은 그 전화 한 통에 전부를 걸게 되는 것이다. 왜냐, 내가 너에게 전화를 거는 길만이 너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니까. 반가운 마음으로 부푼 기대를 안고 전화를 걸었는데 혹시라도 반응이 신통치 않거나 혹은 아예 받질 않아 버린다면? 적어도 이 '안'에서는 그것으로서 이미 '큰일'나버린 것이다.
물론 이건 굉장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발상일 수 있다. 아니, 대관절 군대간게 무슨 벼슬이라도 된단 말인가. 대한민국에서 저 혼자만 군대갔냐.. 아님 군인이 전화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 받아야 하며, 자기 기분에 상관없이 항상 정겹게 받아줘야 한다는 의무라도 어디에 적혀있단 말인가. 그렇다. 사실 나는 이 같은 말들에 논리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 지금 여기서 논리와 합리를 따진다면 난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나는 20대 초반에 2년 3개월간의 국방의 의무를 지고 있는 '군인'들이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의 친구고 애인이며 또 오빠 동생이기에, 군복무만을 위해 갑자기 외계에서 떨어진 생명체가 아니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신들과 같이 웃음을 나누던 이들이기에, 나는 어쩌면 뻔하디 뻔한 이와 같은 이유로 슬며시 지금 이 글의 당위를 찾고 싶다.
Part II. 내게는 너무 버거웠던 일방소통의 무게
내게는 너무 버거웠던 일방소통의 무게
지금은 좀 바빠서 전화 받기 곤란하다며 양해를 구하는 사람, 왜 넌 꼭 바쁠 때만 골라 전화하냐며 이번에는 제대로 받을 수 있다고 너스레를 떠는 사람, 그리고 어제 부재중 2통이 찍혀 있는 걸 보고 무서웠다며 농담 삼아 얘기하는 사람까지. 나는 이런 상황들이 펼쳐질 때마다 애써 태연한 척, 쿨한 척 하곤 하지만 사실은 그럴 때 마다 가슴 한쪽이 서글프게 시려옴을 느낀다.
물론 나는 그대들의 말이 진짜라는 것을 믿는다. 정말로 사정이 있어 못 받았고, 내가 꼭 당신이 바쁠 때만 골라서 전화했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리고 당신이 내 기대만큼 반갑게 전화를 받아주지 않고-뭐 물론 정말로 안 반가워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그렇게 일상적이고도 태연하게, 농담과 장난을 섞어 내 전화를 받아 주는 것이 실은 나를 위한 속 깊은 배려임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라는 놈은 아직 너무 나약하고 이기적이라서, 수화기를 내려놓고 들어가는 발걸음에는 언제나 쓸쓸함이 감돌았으니, 이런. 이따위 섣부른 투정을 부리려고 글을 써대고 있는게 아니건만..
Part III. 비극적인 아픔이 이제는 사라지길
비극적인 아픔이 이제는 사라지길
가끔씩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다 보면, 본의 아니게 후임들의 통화내용을 엿듣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내 앞에서는 꽁꽁 얼어 있던 녀석들이 어느새 달변가가 되어 있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역시 그들에게는 공중전화가 '구원'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곤 한다. 별로 즐거울 것도, 별로 놀라울 것도 없는 소소한 이야기들에 즐거워하는 녀석들. 며칠 전 통화했던 친구의 목소리가 괜시리 또 듣고 싶어 수화기를 드는, 소통의 내용에 앞서 '소통 그 자체'에 목말라 있는 사람들.. 그리고 서글픈 내 자신이여.
비록 나는 이런 감정을 느낄 날도 얼마 안남았지만, 그리고 이젠 가슴이 무뎌질 대로 무뎌진 나지만, 왠지 모르게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얘기라고나 할까. 일.이병도 아니고 입대한지 2년을 넘긴 주제에 왠 푸념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왠지 나는 내가 이 글을 꼭 써야만 했었으리라는 운명 같은 의무감이 든다. 지금껏 내가 말했던 '서글픔'이란 것이 '아픈 만큼 성숙해지리라'며 '성장통'의 일환으로 덤덤하게 받아들이기에는 조금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그러니까 겪어서 좋을 게 없는 불필요하고도 비극적인 아픔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조금씩만 더 신경 쓴다면 겪지 않아도 될 아픔이요, 싹틀 일 없는 상처라는 얘기다.